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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시장에서 구경하다가

3개만원모자집이 있길래 구경함~

 

아주평범한 모자가 필요해서 갔지만

화려한것까지~ㅎㅎ

 

넘나 화려한모자들도 있어요~

겨울모자들도 있고요~

여름 햇모자들도 있어요~

이불들이랑 같이 판매하더라고요~

어느정도팔다가 또 다른 품목들로

바꿀수도 있을것같은 곳같기도해요~

 

 

글구, 보니 사진을 않찍었네요~ ^^;;;

위치는 남겨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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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나가면

반찬이랑 떡은 왠만함 사오는데요~ㅋ

 

떡은 중간에있는 오복떡집을 자주 들립니다.

좋아하는 종류도 많이있고해서요~

 

 

3팩에 5천원인데요~

현금결제시라고합니다.

 

남문시장갈때는 이래저래해서

현금도 어느정도 챙겨서 나가야 해요~ ㅎㅎ

 

 

 

 

 

구매후 집에오기전에 좀씩 집어먹어서...

 

사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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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도깨비에서 아침일찍

 

지동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간곳은~

 

 

지동시장 초입에 있는

수원 만두집

추억의 장날 만두

 

만두가격은 6개 3,500원

고기왕만두가 인기메뉴라고 합니다.

저도 거의 이것만 먹었었어요~ ^^

 

 

삼형제분께서 운영하시는 만두집

 

 

 

 

 

 

 

 

 

 

꾀먼곳에서도 만두를 먹기위해 오신다더니~

아침부터 줄이 많으네요~

 

전, 순대국밥을 먹구 나와서

만두는 건너 뛰기로~

 

사실 이만두는 이근처에서 일할때

자주 사먹었어서~

배부르니 생각이 않나네요~ ^^

 

피가 참 부드럽고 맛있는 만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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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 가래떡처럼 굵은 떡볶이랑 오뎅

 

학창시절 남문에 가서 분식을 먹을때면

남문떡볶이랑 코끼리만두 신포우리만두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해바라기분식점

먹은지 좀 오래되긴했지만 바빌론(수원토박이만아는옷집)근처

리어카에서 닭똥집과떡볶이를 파는집~

갠적인 추억과 맛으로 추천한다면

남문떡볶이랑 닭똥집과떡볶이양념집추천합니다.

신포우리만두는 어쩌면 넘 평범할수도 있어서 두번째로~

 

 

얼마전 생활의달인인가에서 코끼리만두가 나왔다던데...

여긴 추천하지않습니다...

갠적으로 코끼리만두는 어릴땐 몰랐는데...

어른된후 몇번 찾을때부터 불친절함이...

특별히 어떤 않좋은 사건이 있진않았지만

불쾌한.... 방송탄 뉴스글 댓글에 보면

저같이 느끼는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ㅎㅎ

또 반대로 추억의맛이라고 애정하는분들도 계시니

판단은 잇님들의 몫으로~~ ^^

 

 

오늘은 포장해갔어요~

튀김이랑 떡볶이~ ^^

 

 

 

 

 

 

 

 

 

 

 

 

 

 

 

검색하니 옛날 주소가 나오네요~

위치가 별있는 쯤으로 바껴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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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남문시장에있는

다이소

 

 

전 엘레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가서

내려오면서 구경했어요~

 

원래는 5층부터 갔는데~

구경하다보면 시간이 엄청걸려서

오늘은 한층 빼고 돌았네요~

 

사진은 4층3층 정도만 보이는데로 찍었네요~

 

1층엔 악세사리종류도 많이있어요~

안경,선글라서도 여러종류있고요~

 

여기는 워낙넓어서 그런지

한품목당 종류가 많은 장점이 있어요~

 

 

 

 

 

 

 

 

 

 

 

 

 

 

욕실화도 그렇지만

이렇게 한품목당 종류가 여러가지있어요~

 

집근처다이소만 다니다

여기오면

구경하다가 시간 엄청써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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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드라마

보는중~ 잘아는곳이 나오네요~ㅋ

 

수원에 남문에가면

큰 시장들5개가 모여있는데요~

그중 영동시장~

영동시장에는 대체로

이불,한복,속옷,잡화,수선등이

주로 많이 모여있습니다.

 

 

그전에 과일가게나온곳도

근처일거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서 패쓰

 

영동시장1층에

주단점들 많은곳~

간판보면 한글자씩 지워져있네요~ㅋ

 

 

 

 

 

 

ㅎㅎ 여기도 넘나 익숙한곳~

뒤에 가게도 영동슈즈인데

영자 지워져있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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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수원 화성(華城)은 조선후기 정조(正祖)시대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자족적(自足的) 계획도시의 건설이었다.
화성성역(華城城役)은 조선후기 변화하는 세계정세 속에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태도, 전통적인 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안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794년 1월 7일 돌을 채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26일 총리대신(總理大臣)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 1720~ 1799), 감동당상(監董堂上)에 화성유수 조심태(趙心泰 : 1740~1799)를 임명하여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국왕으로부터 신료와 일반 백성의 노력이 결집되어 2년여 만인 1796년(정조20) 9월에 공사를 마친 뒤,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을 열고 완성하였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된 화성은 전체 길이 5,744m로 대부분을 돌로 쌓았으며, 일부 중요한 방어 시설은 벽돌로 쌓았다.
4개의 성문과 5개의 암문, 2개의 수문, 2개의 은구, 2개의 장대, 2개의 노대, 3개의 공심돈, 4개의 각루, 5개의 대포를 설치한 포루, 5개의 포루, 1개의 봉돈, 8개의 치, 3개의 포사, 용도 등의 시설물이 있다.

화성성역은 국왕 정조의 장기적 정치 구상에 따라 훗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웅거할 정치적․군사적 거점으로 추진되었지만,
이는 조선왕조의 발전방향이나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새로운 상업과 농업, 교통과 상품 유통의 중심도시로 건설되었다.
이 원대한 구상은 신민(臣民)의 협조와 참여에 힘입어 실현될 수 있었다. 신도시를 건설하는 실제적 구상과 작업과정에는 중흥을 맞았던 조선 문화의 세련된 수준이 충분히 반영되었으며,
정조의 의지 외에 여러 신료의 학문과 경륜, 민(民)의 호응, 그리고 조선정부의 충실한 재정과 운용능력 및 조선왕조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 등이 총체적으로 투입되어,
왕조 중흥과 왕권 강화의 표상이라고 할 위대한 민족문화유산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 신도시를 둘러싼 시설인 화성 성곽은 조선의 고유한 성곽 특징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조선 후기까지 축적된 전통적 성곽 건설 경험과 중국으로부터의 최신 과학 지식을 수용한 뛰어난 성곽으로 평가 받아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된 것을 무사라 한다]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 높이가 23척 5촌, 왼쪽과 오른쪽의 와장대(臥長臺)는 각 32척 4촌, 섬돌은 각 23층 너비는 17척 2촌이다.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 높이가 23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 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쌓았는데, 두께는 4촌이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너비 1척 깊이 5촌]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안쪽의 평여장(平女墻)은 너비 88척 7촌, 높이 4척 3촌, 두께 2척 5촌이고 바깥 쪽 여장의 높이 두께도 같으나 너비는 동서장 밖으로 각각 7척 4촌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는 높이가 6척이 되어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며 타구(口)는 10개[첩(堞)은 11개]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네모의 한 쪽 길이는 8촌이며, 첩마다 1 개를 뚫었고, 가운데에 있는 1개의 첩에는 2개의 총혈을 뚫었음]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너비 3척 5촌, 높이 5척 6촌, 중앙에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는데 높이는 6척 5촌 너비는 6척이다.
장(墻) 안에는 2층의 누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2척 9촌, 아래 위 각각 10간(間), 가로 너비는 5간 세로 길이는 2간이다.
아래 층[안은 7포, 바깥은 5포] 정면 간의 너비는 22척 5촌인데, 바닥[높이 1척]에는 널판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둘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이며, 세로 길이 2 간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간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간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에는 연다].
위층[안팎 모두 7포]은 정면의 간과 좌우 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이며, 그 세로가 2간 전체 길이는 18척인데 모두 널판지를 깔고, 사면에 널판지 문을 달았다.
그리고 3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려 호로전안(葫蘆箭眼)[널판지마다 구멍이 하나씩 있는데 경(經)이 3촌 직봉(直縫) 역시 3촌이다]을 뚫었는데 안 쪽에는 태극을 그렸다. 단확(丹)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문 안 서쪽 가에는 수문청을 별도로 세웠다.[협도(夾刀) 넷을 세웠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위에 적루(敵樓)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정문 좌우의 무사에서 각각 7보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17척 안쪽 둘레는 159척 6촌 바깥 둘레는 209 척이고, 아래는 두께가 15척이고 위는 줄어 들어서 12척이다.
바깥 쪽에 현안(懸眼) 16개를 뚫었다[각각 길이 2척, 지름 2척 2촌]. 안 쪽에 벽돌로 된 홈통 8개[지름 각 5촌]를 설치하였다.
옛 제도에는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한쪽 문만을 열었으나 지금은 사방으로 열리고 팔방으로 통한다는 뜻을 취하여 중앙에 문을 설치하여 정문과 마주하게 하였다. 양문의 사이는 10보 3척이며 돌로서 안팎으로 홍예를 만들었다.
안쪽의 홍예는 너비가 18척, 높이 19척이고 바깥 홍예는 너비가 16척 높이가 17척 5촌이며 안팎 홍예의 사이는 좌우 높이가 21척이고 양 선문(扇門) 안에는 쇠로서 빗장이 설치 된 것이 정문과 같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세 가지 물건으로 쌓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때 물을 내려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오성지 위에는 성가퀴 9첩을 설치하였는데, 전체 너비 38 척이고, 그 좌우는 1층을 낯추어서 凸 모양의 성가퀴 7첩을 설치하였다. 너비는 각각 10척 2촌이며 높이는 모두 5척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凸의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으로 높이는 3척 5촌, 두께는 모두 2척 6촌이다.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문의 양 옆은 평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10척 7촌이다.
북성의 적대는 2개로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옛 제도에는 70보 되는 곳에 1대를 세우고, 활화살 화창(火槍)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대략 이 제도대로 하면 대의 높이는 2척으로, 원성의 성가퀴와 나란하고 반은 성 밖으로 나오고 반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깥 쪽의 아래 너비는 26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1척이다.
현안(懸眼)[각각 길이는 20척이고, 지름은 5촌이다]이 3개 있다.
좌우의 아래 너비는 각각 29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4척이다.
凸 모양의 성가퀴로 둘렀는데, 바깥 3면은 11첩(堞)이 있는데 높이는 5척이고 두께는 2척 8촌으로 각각 총안[사방 6촌]을 뚫었다.
내면은 좌우 평평한 성가퀴에 각각 1첩씩인데 높이는 8척 이고 가운데 5척은 속이 비게 하여 돌계단을 설치하여 대 위와 통하게 하였다.

 

창룡문[편액은 판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썼다]은 성의 동문이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 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3물로 하였고 두께는 3촌이며, 거기에다 안팎으로 장대 각 2층 홈통 각 2개를 더하였다. 안 쪽은 평평한 여장으로 너비는 51척 높이가 4척 7촌 두께가 2척 1촌이다.
외면은 여장의 너비와 높이 두께는 모두 내면과 같다.
타구(口)는 6개[첩은 5개], 방안 총혈은 6개 [각각 사방 8촌 가운데 1첩은 구멍이 2개], 좌우의 여장은 각각 너비가 23척 높이가 5척 6촌 가운데에 작은 널판지 문을 설치하였는데 높이 6척 너비 5척 5촌이다.
장(墻)내에는 6간의 누를 세웠다[안팎 3포(三包)에 2익공(翼工)]. 정면의 간(間)은 너비가 16척 5촌인데 밑에 널판지를 깔았다[높이 1척].
좌우의 협간은 각각 너비가 8척 5촌 모두 세로 2간이며 전체 길이는 16척이고 기둥의 높이는 7척 5촌이며 단확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수문청은 3간으로 문안 북쪽 가장자리에 있다.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보 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보 3 척 되는곳 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보 1척이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척 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척 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촌]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척 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각각 길이 8척 5촌 직경 1척]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척 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매 첩마다 3개의 구멍 또 북쪽 끝 가로 첩에는 2개의 구멍] 14기를 뚫었다.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3물을 혼합하여], 그 남쪽 끝에는 돌 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과 통하게 하였다.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의 전석에서부터 다리 밑까지 높이는 8척 7촌, 다리의 두께는 1척 9촌이다. 장대는 높이 1척이고 다리는 너비가 31척 길이 95척이다.
장대 위에는 누조(漏槽)[각각 너비 1척 깊이 5촌] 7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첩을 설치했으며, 타구는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는 5척 4촌 두께는 4척 8촌이고,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서쪽 기둥의 북쪽과 동쪽 기둥의 동쪽에는 짧은 담을 쌓고 전판문(箭板門)을 설치하여 동쪽 성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다리 위 북쪽 편에 누각 6간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간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간이다. 모두 널빤지를 깔았는데 첩의 위로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사면에 분합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잎을 새긴 난간을 붙였다.
난간 아래에는 벽돌을 둘러서 담장을 만들고 남쪽 한 가운데 1간을 비워서 들고 나는데 편하게 하였다.
방사(放射)하는 제도는 포루와 같다. 다리 위에서 널판지 깐 데까지 높이가 6척 2촌이다.
북쪽 분합 밖으로 물려깐 널위에는 전붕(戰棚)을 설치하였고 판문 아래에는 벽돌로 된 첩과 이어지게 하였는데,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총안(箭銃眼)을 뚫었다.
단확은 녹색을 바탕으로 하고 진채(眞彩)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누 남쪽 다리 위의 길은 너비가 5척이고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는 각각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하였다.
줄로 양선(兩扇)을 걸어 당겨서 교면(橋面)의 석안(石眼)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
문 안의 양쪽 석축은 각각 길이가 6보 높이가 4척 5촌이고, 문 밖의 석축은 각각 길이가 5보 높이가 5척 5촌인데, 위로 성의 몸체와 이어져서 전체 높이는 16척이다.
이것이 실지로 내의 동쪽과 내의 서쪽이 서로 마주 서서 휘어 꺽여 원성(元城)이 되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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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남문시장

요즘은 주변으로도  대규모아파트단지로 형성된 곳들이 (뭐, 영통같이....)생기면서 예전같진 않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보고 사고 할때면

한번씩 들리게 되는곳~ 오늘은 먹거리를 관련~~ 제가 아는곳중에 괜찮은곳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아!참~!! 지동시장앞 광장에 야시장이 생겼대요~

아직 가보진않았지만 3월부터는 더 늘어날 전망이라고 하네요.결제는 카드도,현금도 되구요~맛깔나는 메뉴도 많습니다.

저녁 5시부터 밤 11시까지한다고 합니다.저는 늦은오후 진미통닭에 닭사러갈때 있는데~담에 한번 들려봐야겠어요~ ^^

 

아, 진미통닭 아시죠~?? 저는 어릴적부터 먹었습니다.지금은 가게가 막 커지다가 천변 근처로 더 커지면서 이사갔습니다.요즘 치킨가격을 생각하면 14000원인 저렴한편 입니다. 무랑,콜라랑, 양념소스,겨자소스를 줘요. 전, 이집만의 특징은간간하고 바삭한 튀김옷과 겨자소스같아요.정말 톡쏘는 겨자맛이 강한 겨자소스가 어른들입맛에 딱 이거든요~용성통닭도 유명합니다. 용성통닭집의 특징은 닭발을 튀겨줍니다.

원래 예전에 있던 진미통닭집 옆으로 입주집이 있어요~여긴 곱창집인데요... 소곱창이다보니 기본가격이 좀 있지만, 이집도 단골은데요. 다른집가서 먹으면 실망만되요~~ 사장님이 정성껏 초벌하구 나옵니다. 고소고소해요~가격도 있으니 염통도 어느정도 섞어서 먹으면 좋습니다.싱싱한 간이랑 염통도 나오고요~ 같이 나오는 콩나물 무침도 맛깔나구 열무국물도 있고요~아주 늦게 까진 영업하지않아요~ 재료가 소진되면 더 일찍 닫기도 합니다.맛있는 곱창집에 목말라 계신분들께 강추하는곳이에요~지인들이랑 같이가도 다 맛있다고 하시거든요~ ^^

다음은  팔달문시장안에 (남문시장안에는 영동시장,못골시장,팔달문시장, 미나리광시장,지동시장...모여있어요~)

분식집을 추천해볼께요. 코..분식집 여기도 오래되고 인지도 많은데요. 전, 그닥 되려 여기보단  신포우리만두 분식이 나은것 같아요.

젤 애정하는건 남문떡볶이입니다. 가래떡 떡볶이인데요~요게 요게 한번씩 생각나요...ㅎㅎ 옛날장소에서 이전을 한번했더라고요~

좀더 특별한걸 찾으시면 옛날 바빌론자리 (토박이만 아는) 팔달주차타워에서 다리건너서 쭉~~가다가보면 리어카에서  닭똥집이랑 떡볶이를 같이하는곳이 있습니다.여기도 은근 한번씩 생각나는 맛이에요. 추천드려요~~ ^^

그라인에는 쥐포랑 문어 굽는 리어카들도  있는데요~쥐포구운건 꾸이맨 같구요~문어구이도 반건조오징어같은 식감에 맛있어요.

남문에서 먹거리를 찾으면 우선 순대국을 먹어야할것 같은데요.저도 지동시장에서  지동순대나 순대국이나볶음도 잘먹는데요.

순대국말고 먹을만한거 뭐 있냐고 물어보시는분들도 많으셔서 함 담아봅니다.

참, 미나리광시장입구쯤에 꽈베기 집이 유명합니다.티비에 여러번 나와놓구도 현수막도 않붙이시고 장사하세요~~그래도 사람들이 티비에나왔던 꽈베기집 어디냐며 물어물어 찾아오죠~ 가격도 착하니~ 시장구경시 군것질용으로 추천드려요.

그밖에도 참, 맛있는게  넘 많은 시장~ 조만간 한번 더 떠야겠어요~~ ^^

 

팔달주차타워나 지동주차장에 주차하고 볼일보는게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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