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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민주항쟁기념일

 

민주항쟁은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표한 4.13호 헌조치 발표 후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이 연대해

6월 민주항쟁의 구심체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고,
그해 6월10일을 정점으로

20일동안 전국으로 확산된
민중항쟁,민주화운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4.13호 헌조치는

대통령간선제를 요체로 하는

기존의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확산되는 와중에

5월18일 대학생 박종철군의 고문살인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6월 민주항쟁의 본격적인

움직이 시작됩니다.

 

 


1987년1월14일

부산출신 서울대생 박종철의

의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박군의 죽음을 독재정권이 자행한

민주화세력에 대한 살인행위로

규정한 시민과 ‘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재야인사들은 박종철 추도집회를 준비하며

독재정권에 대한 전면적 항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2월 7일에는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가 열리고,

3월 3일에는

박종철군 추모 3.3 부산대행진이 열렸다.

 

 

 


‘2.7’, ‘3.3’ 집회를 거치면서

경찰의 폭압적인 시위대 진압을 목격한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과 무자비함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민주세력의 강력한 후원자로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상인들은 영업에 막대한 지장이 있음에도

시위대를 숨겨주고 전두환을 쫓아내라고 격려했다.

 

거듭되는 민주화 요구에

위기의식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 국면전환을 시도했으나,

이것은 항쟁의 용광로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5월 20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지부’가 결성되어

부산지역 6월 항쟁을 이끌었다.

전국적으로는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여기에 시민들이 시위대에 가세하면서

6월 항쟁은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16일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이

정부와의 타협으로 인해 해산되자

전국적 시위 열기도 식어 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우리 지역에서는 6월 16일 심야시위 도중

경찰에 밀린 시위대가 가톨릭센터로 피신하여

‘가톨릭센터 농성’을 전개하면서

6월 항쟁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고,

이는 항쟁의 열기가 식어가던

다른 지역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이다.

 


6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었다.

물론 4.19나 5.18 등등 분수령이 많았지만

6월 항쟁은 군사독재와 싸워 이겼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은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독재에서 민주로 그리고 개발과 성장 중심에서

분배의 조화와 삶의 질을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분수령이었다.


이운동으로 전두환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6월 29일 군사독재의 종식을 알리는

선언을 발표합니다.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법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등의 내용이 다뤄지게 됩니다.


이후,

5년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하는

 9차 헌번 개정으로

제6공화국이 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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