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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리 저수지

잠시 구경~ 탁트여~ 바람쐬기 좋은곳이네요~

 

 

 

 

저수지구경하고 근처에 갈만한곳 있으면 가자하고

한바퀴돌다가

경치가 좋아서 자리잡은 식당입니다.

옛수원가든

 

 

 

 

삼겹살이랑목살이랑4가지로 된거 2인분

돼지갈비 2인분 주문

 

2인분인데...양이 넘 적은듯...^^;;

4인분으로 부족해서 고기도 더 추가하고

파전이랑 도토리묵도 시켰네요...

 

 

 

 

 

저흰 원두막처럼 생긴곳에 자리를 잡으니

이렇게 바로앞에 숯을 피워주셨어요

 

직접 구워먹어야합니다~ ^^

 

 

 

방갈로 같은 방들은 몇일전 미리 예약해야한다고 합니다.

 

 

이곳은 앞으로 넓은 잔디밭~

저수지가 보여서 경치가 넘좋아요~

 

그리고 여긴 애견과 같이 와도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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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랜드(워터파크&찜질방)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시청로 888 에

있는 하피랜드입니다.

 

 

 

 

 

 

 

 

 


음식물/돗자리/유모차/애완동물 반입을 금지하고 있으며

입장시 게이트에서 반입확인(가방확인등)을 실시하고 있다합니다.

하피랜드뜻은 화성시 팔탄면 율암리의 행복한 지역을의미하기도하며,

이집트 나일강의 중요의상징인 물의여신 하피를 의미하기도 한다네요.


워터파크는 사계절운영하며

입장시간은 10시이며

퇴장시간은 계절에 따라 변동있습니다.

사우나찜질방은 24시간 운영한다고 합니다.

 

홈페이지 방문하기>>


입장요금은 선물이며 영업장에서는 락카키를 사용하고

요금은 퇴실시 후불제로 정산하며

프론트이외의 영업장에는 현금을 받지않는다고합니다.

입장후에는 이용요금에 대하여는 환불이 없으니

입장시 이용할 요금을 확정하시고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입장후 영업장내에서 찜질방 또는 워터파크를 추가로 이용할 경우에는

정상가격으로 적용받으며 후불제로 정산하게 됩니니다.


국민카드,신한카드로 워터파크만 20%할인가능하며

카드중BC카드일경우할인적용에서 제외된다고합니다.

입욕권을 30매를 구매하면 30%할인받은 189.000원에 구매할수 있으며

6개월안에 사용해야한다고합니다.


워터파크 타워슬라이드이용시

구명조끼 착용후 슬라이드 탑승을 금지합니다.

안경,수경,시계,목걸이 등 악세사리 착용을 금지합니다.

1인탑승만해주세요. 만7세~만15세까지 슬라이드 탑승이 가능합니다.

키는 120~160cm까지 탑승이가능합니다. 70kg이상 탑승을 금지합니다.

슬라이드 탑승요령과같이 올바른자세로 탑승해주세요.

수영복에 손상이 있을경우 당사는 책임을 지지않습니다.

라이프가드 지시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임산부,노약자,성인은 탑승을 금지합니다.

 

 


찜질방식당에는 미역국,김치찌게,떡라면,돈까스,떡국,설렁탕,짜장밥,떡만두국,제육덮밥,뚝불고기,새싹허브비빔밥,도토리묵밥,알밥,냉면,된장찌게,어묵우동,라면 참숯가든에는 허브삼겹살,허브목살,돼지김치찌게,된장두부전골,냉면 치킨류로 닭다리,골드윙,라이스볼 공용매점에는 군계란,핫바,컵라면,식혜,녹차,커피,수정과,칡즙,복분자,감식초,매실,석류,레몬티,복숭아티,체리티와 각종음료수,과자류,구슬아이스크림,아이스크림 워터파크매점에는 군계란,핫바,식혜,녹차,커피,수정과 칡즙,복분자,감식초,매실,석류,레몬티,복숭아티,체리티,가종음료수,과자류,구슬아이크림,아이스크림 시설로는 PC룸, 유아놀이방, 안마기, 영화관,편의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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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도14)에 누문6칸을 세우고 진남루라고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땅은 새로운 또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레 한것이다. 1795년 을묘행차시에 신풍루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먹이는 진휼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좌익문은 중앙문앞에 있는데,'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도 도와행궁을 지키는 중상문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있다.
중앙문 양문은 궁궐건축의 삼문설치 형식에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활을 하는 내삼문이다. 1790년(정조14)에 완성되었으며,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1795년 봉수당 진찬례때 봉수당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앙문밖으로 대문을 활짝열어 승지와사관,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있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완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데,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1794년(정조 18) 행궁을 증축할 때 5량 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집사청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저 있다.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자와『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붙인 것이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이다.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 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停)'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수원 추팔경의 하나인 한정품국(閒亭品菊 : 국화꽃 벌여놓고 황상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내포사는 행궁의 뒷담 안 왼쪽 기슭의 미로한정의 북쪽 50보(59.4m)쯤 거리에 위치하였다. 1796년(정조20) 9월 9일에 준공된 이 건물의 높이는 7척 5촌(2.32m)이다. 다만 온돌 1칸만을 놓았으며, 앞으로 반칸을 물려서 벽돌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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